디어 | 지구로부터

weirdos

 

 

 

끄하학 혹은 꺽꺽 대며 웃는 애. 쓸데없이 감수성 풍부하면서 자기 범주 외의 사람에게는 관심 두지 않는 애. 웃는 얼굴로 사람 쳐내는 애. 다정하게 지랄 떠는 애. 신은 믿지 않으면서 외계인은 믿는 애. 익힌 당근은 안 먹으면서 생당근은 잘만 씹어 먹는 애. 제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애. 사람들은 김원필을 또라이 내지는 미친놈이라고 불렀다.

 

 

 

 

 

지구로부터 w.디어

 

 

 

 

 

대로의 경적 소리가 시끄러웠다. 횡단보도가 있는 길가에 멈춰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인다. 머리 벗겨진 택시 기사가 욕을 지껄였다. 정신 나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신호도 바뀌지 않은 횡단보도 위에서 목걸이를 쥐고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는데 정신병원에서 막 탈출했거나 자살을 시도 중이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게 틀림없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감하려 노력 중이었으나 낯선 사람의 자살 시도를 목도하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성정이 못 되었다.

 

김원필은 역시나 시선 돌리지 못했고 정신 나간 남자를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 김원필이 차선을 가로지를 때마다 미친 새끼 운운하는 욕설과 고막에 꽂히는 경적 소리가 더해졌다. 갑자기 뛰어든 탓에 도로 위의 차들이 급정거했으나 김원필은 개의치 않았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어깨 붙잡고 마주 세우니 두 눈을 꿈뻑인다. 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삐쩍 말라가지고 뭔 놈의 힘이 그렇게 센지 당겨도 꿈쩍을 안 했다. 남자는 저보다 키가 족히 반 뼘은 커 보였는데 내려다보는 눈이 벌레 보듯 귀찮아 보여서 울컥했다. 여기 서 있으면 죽는다고. 상관없으니까 놓으셈. 이상한 데에서 감성적이었고 쓸데없이 공감 능력이 뛰어났던 김원필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짜 죽으려고?"

 

세상이 좆같고 사는 게 구차해도 제 손으로 목숨을 끊기엔 아직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있지 않나. 남자가 살아가기를 바랐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남자를 동정했다. 연민했고 죽지 않았으면 했다. 여기저기 까진 손등을 끌어와 잡았다.

 

"죽지 말고 나랑 가자."

 

"죽는다는 거 구라임."

 

정 안되면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울어줄 의향까지 있었던 김원필은 빈정이 상했다. 씨발 진짜 정신 나간 놈. 내가 뭘 위해서. 손을 뿌리치고 어느새 초록 불로 바뀐 보도를 횡단했다. 같이 가. 나 갈 데 없어. 절뚝이며 따라와 잠깐 머물렀던 손 다시 맞잡는다. 내색 안 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갈 곳 없다며 손 세게 붙잡는 얼굴이 퍽 불안해 보여서 신경 쓰였다. 다리를 다쳤는지 걷는 속도가 느렸고 김원필은 또 바보처럼 보폭을 맞췄다. 원래 처음 보는 사람 집에 안 데려가는데. 눈가에 주름이 생기도록 맑게 웃는 김원필은 모두에게 살갑게 굴었으나 곁은 내주지 않는 걸 당연한 일로 여겼다. 다만 제 뒤를 따라오는 낯선 남자는 너무 불쌍해서 그런가 딱히 들이려고 한 것도 아닌데 제 바운더리 쳐부수고 들어온다. 각 안 재고 부딪치는 남자는 좀 미친놈 같았고 평소 같았으면 웃으며 잘라냈을 일을 어영부영 넘기는 자신도 좀 이상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괴짜는 괴짜와 통하는 법이다.

 

 

 

 

 

*

 

 

 

 

 

어디서 굴렀는지 몸 여기저기 푸른 멍과 불그스름한 생채기가 눈에 띄었다. 혼자 사는 이십 대 성인 남성 집에 구급상자가 제대로 구비되어 있을 리 없었고 상처 위에 대충 마데카솔 펴 바르니 따가운지 미간을 찌푸린다.

 

"누구한테 맞았어?"

 

"착륙할 때 좀 다쳤어."

 

남자는 끊임없이 자신이 우주의 한 별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김원필은 외계생명체를 믿는 쪽이었으나 난데없이 외계인이 눈앞에 뚝 떨어진 상황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정신 병동에서 탈출하다가 얻은 상처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구라까지 말라고 수백 번 말했고 남자는 화를 내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고 토라져 버려서 종국에는 믿는 척을 해줬다.

 

"그럼 이름이 뭔데?"

 

"제이."

 

본인을 별다른 성도 없이 제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439살이랬다. 23살 김원필의 나이를 듣자마자 기함했다. 너 언제 다 사냐? 지구에서는 20살이 성인이에요, 할아버지. 제이는 실없는 농담에도 잘 웃었다. 쉽게 좋아했고 금방 감정을 드러냈으며 빨리 가라앉았다. 감정을 숨기는 것을 미덕으로 치는 뭇 지구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다. 호기심이 생긴 김원필은 자꾸만 목걸이 만지작거리는 제이 앞에 앉혀두고 이것저것 물어봤고 제이는 귀찮아하면서도 일일이 답 다 해줬다.

 

"원래 살던 별 이름이 뭐야?"

 

"마릴린."

 

장미꽃이 아름다운 별 마릴린에서 온 제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러 별들을 여행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소행성에 착륙해야 했으나 남은 연료 계산을 잘못해 지구에 불시착한 거라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정말 덤덤하게 해서 믿을 뻔했다. 하루에 노을이 두 번 찾아온다든지 엄청나게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어쩐지 말려드는 기분이 들어 끄하학 웃었다. 제가 웃으면 말을 하다 말고 제이도 같이 웃었는데 이유는 몰랐다. 가늘게 남은 이성이 이 정도의 망상병 환자면 정신병원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속살거렸는데 제가 짓는 표정을 따라 하기라도 하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을 보다 그냥 무시했다.

 

재미있으니까 일단 냅두자고.

 

 

 

 

 

*

 

 

 

 

 

제가 강의 듣느라 집을 비우는 동안 제이는 가만히 있긴 좀이 쑤셨는지 뭔가를 하긴 했다. 주인 없는 집에서 할 일이라곤 빨래 개기, 설거지하기, 화분 들여다보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밖에 없어서 심심하면 티비나 보고 있으라고 리모컨을 쥐여주고 나왔다. 표정 감추지 못하는 제이는 제가 나갈 때마다 아쉬운 얼굴을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집 잘 보고 있으라고 일러두고 나와도 이따금 제이는 대문 아래로 두세 개 있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둑한 땅거미가 아스팔트 위에 내려앉을 때까지도 도어락 해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그러고 있었다는 거다. 나기를 그렇게 난 건지 마릴린인의 외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유난히 동글동글한 머리통 들고 왜 이제 와 필아, 웅얼이는 말 듣고 있으면 미안할 일 아닌데도 부러 변명처럼 덧붙였다. 내일 발표라서 맞춰보느라 오래 걸렸다는 말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마릴린 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제이는 두서없이 말하기를 좋아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곧잘 입 밖으로 꺼내곤 했는데 제가 기르던 장미에게 말 거는 습관 때문이랬다. 여전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서도 그 별의 장미는 무려 말을 한다고 해서 믿는 척해줬다. 제이의 장미는 성격이 좀 안 좋은 편이랬는데 심심하게 하면 반항이라도 하듯 자꾸 꽃잎을 떨궈서 속상하게 했다고. 지구의 식물들은 말을 못 하는 게 당연한데 제이는 제 집의 조그만 산세베리아 화분에 대고 자꾸 말을 걸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다 그마저도 흥미를 잃으면 괜히 저한테 틱틱거렸다. 니가 잘 안 해주니까 쟤가 말을 못 하는 거임.

 

 

외계인이라는 놈이 왜 한국어로 말하는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지만. 한국어로 말 잘하다가도 가끔씩 외국인처럼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아니 왜 사과가 미안한 거야?"

 

먹는 사과랑 미안하다는 사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입이 닳도록 설명했는데 그럼 미안하다고 할 때는 사과를 주는 거냐는 말을 되풀이하길래 포기했다. 잘 모르는 놈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지구에선 원래 그런 거라는 제 말에도 아닌데 아닐 텐데, 얄밉게 받아치는 게 아주 그냥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제이, 너 장미꽃한테 맨날 욕먹었지. 아니거든. 내 장미는 나 짱좋아했음.

 

 

하여튼 제이는 여러모로 이상했다. 23년 살며 본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미친 거에 가까운 건가. 기껏해야 20 중반으로 보이면서 439살 먹었다고 우기고, 길쭉한 몸 접어 엎드려서 화분에 대고 말 걸고, 먹는 사과랑 미안한 사과 구분도 못 하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여행 다닌 별 줄줄 설명해주는 사람이 어디 흔하냐고. 그 별에서 만난 사람은 허풍이 심했고, 다른 별 사람은 숫자만 셌고. 말하기 좋아하는 제이 말 가만히 듣다가 궁금해져서 물으면 입을 다물었다.

 

"그럼 제이, 지구는 어떤데?"

 

"아직 모르겠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정신병자를 집에 들인지 꼬박 보름이 지났고. 김원필은 이상한 제이에게 익숙해졌다. 길들여졌거나. 제이는 여전히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고. 산세베리아에게 말을 걸었으며. 별 이상한 프츠츠 소리를 내며 웃었다. 창밖을 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진 제이를 보다 느낀 건. 큰일 났다는 거 단 하나. 고작 이주 남짓한 시간 동안 같이 잤다고 제 체온보다 낮은 온도의 몸 옆에 있지 않으면 잠이 안 왔다. 가로등 등불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는 작은 머리통 보이지 않으면 섭섭했다. 제이한테 장단 맞춰준답시고 옆에서 산세베리아에 빙의해 헬륨가스 먹은 듯한 목소리로 대꾸해주고 있는 제가 싫지 않았다. 비좁은 제 영역 쳐부수고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김원필은 자기 범주의 사람에게 속절없이 허물어졌고 제이도 예외는 아니다. 곁 내주고 정까지 줬으면 말 다 했지.

 

으레 그렇듯 새 학기의 시작엔 술자리가 빈번했고 하늘이 어두워지는 단계를 지나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던 시간에 투명한 유리 대문 앞에 도착했던 어느 날. 12시 넘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3월 말의 밤은 쌀쌀했다. 바람이 불었고 살갗 언저리에 와닿는 공기가 찼다. 추운지 마른 몸 잔뜩 웅크리고 있길래 제이, 작게 부르면 언제나처럼 허연 얼굴 들고 왔어? 웅얼인다.

 

"있잖아, 말할 사람이 없어서 니가 필요했어."

 

"그럴 땐 그냥 보고 싶었다고 하면 돼, 쩨이."

 

"보고 싶었어, 원필아."

 

희미하게 웃는 얼굴 보다 어쩌면 익숙해진 게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좁은 원룸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라곤 저밖에 없던 제이에게는 제가 없는 단칸방이 낯선 공간에 불과할 거라는 걸. 도로 한복판에 서 있던 정신 나간 놈이 쫄래쫄래 따라온다고 저까지 뒷일 생각 안 하고 무작정 경계를 넘게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불행한 일 지나치지 못하는 착한 시민으로서 김원필의 역할은 죽으려고 환장한 남자 안전한 인도로 데려다 놓는 거. 그걸 실패했다면 마릴린별 운운하며 헛소리 늘어놓는 망상증 환자 당장 경찰에 신고해 보호자 찾아주고 관심 두지 말았어야 했지. 그것마저도 실패하면 제이의 필요에 제가 포함되지 않게 마음 주지 않았어야 했어. 끊겨버린 실은 다시 묶더라도 흔적이 남고 깨진 물병 이어 붙이더라도 물이 줄줄 새는 법이다.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신나서 재잘대는 제이 보다가 아랫입술을 엇물었다.

 

김원필은 이미 형성된 모종의 관계에는 항상 책임이 따른다는 걸 알고 있다.

 

 

 

 

 

*

 

 

 

 

 

제이는 밤마다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연필로 꾸물꾸물 뭔가를 적더니 야무지지도 않은 손끝으로 흐물한 종이비행기 창밖으로 날리는데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마릴린에 있을 장미에게 편지 보내는 거랬다. 정교하게 접힌 종이비행기도 아니고 금방이라도 펴질 것 같은 종이비행기가 날면 얼마나 날겠냐고. 얼마 못 가 땅에 처박힐 게 뻔했다. 제이야, 그거 우주까진 못 가. 뭐래, 간절하면 어떻게든 닿게 되어있음. 코웃음 치고 다시 편지 적는데 열중하길래 뭔 내용인가 싶어서 들여다보면 죄다 저에 관한 얘기밖에 없었다. 오늘 집에 밥이 다 떨어져서 김원필이 치킨 시켜줬는데 맛있었다는 둥 오늘 김원필이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라 빨리 들어와서 좋았다는 둥 온통 김원필 세 글자투성이였다. 장미가 질투하겠다, 쩨이. 우리 장미는 착해서 그런 거 안 해. 그러면서 편지 끝에는 매번 같은 말을 적었다.

 

꼭 다시 갈게.

 

작은 단칸방에 머무를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서툰 글씨로 눌러 적은 다섯 글자 볼 때면 문득 불안해졌다. 제이가 떠나야 할 때 잡고 싶어지면 어쩌지. 남겨졌을 때 코딱지만 한 단칸방이 너무 크게 느껴지면 어쩌지 하는 그런 생각들.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그래왔듯 제이는 하얀 종이비행기 날리고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누구에게 기도를 올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루 24시간 중 유일하게 제이가 조용해지는 시간이었고 이때의 제이에게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리란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 너 예쁘다."

 

입을 뗀 건 하얀 피부 위에 내려앉는 달빛이 신기해서. 무채색 지구 속에서 혼자만 다채로워서. 이질적이어서. 가느다란 두 손에 담긴 기도 속 저도 있었으면 해서. 금방이라도 지구를 떠나버릴 것 같아서. 마릴린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고 있을 것 같아서. 김원필은 그냥 제이가 외계인이라고 믿고 싶어졌다. 제이가 어느 날 우연히 제 바운더리 부수고 들어온 것처럼 아무 예고 없이 홀연히 사라질 때 그럴만한 명분이 있었으면 했으니까.

 

딱히 기도를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동안 기도 중에 돌아보지 않았던 제이는 김빠지는 소리로 웃으며 제가 있는 곳을 본다. 평소 같으면 예쁘다는 제 말에 뭐래 닥쳐, 로 일관했을 제이는 어쩐지 제 손을 잡아 작은 방 속 유난히 큰 창으로 끌었다. 니도 기도하셈. 난 신을 안 믿는데? 그래도 해.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길래 작은 눈에 어울리지도 않게 긴 속눈썹 잠깐 보다가 그냥 짧게 기도했다.

 

나는 필요 없으니까 쟤 기도나 들어주세요.

 

 

 

 

 

*

 

 

 

 

 

미친 외계인의 이상한 짓 리스트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으나 눈이 조금 오래 마주쳤다 싶을 때쯤 갑자기 와서 이마를 꿍 박았다. 말 그대로 꿍. 아프진 않았는데 새롭게 생각한 시비 거는 방법인지 헷갈렸다. 아 쩨이, 뭐해. 싫은 소리 하면 멋쩍은 듯 머리 몇 번 긁적이다 이내 그만두었다. 다만 의지의 외계인은 꼽먹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꿋꿋하게 머리 갖다 박았다. 제가 치킨 사줄 때나 일찍 들어온 날 유독 그러는 거 보면 싸움을 걸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고집불통에 괴짜 같은 외계인은 제 말 곧이곧대로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으므로 쓸데없는 데에 기력 소모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데에 기력 낭비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자고. 모든 것은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지금 제이가 있어야 할 곳은 제 옆이 아닌 어드메쯤의 우주.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우주를 여행 중이라고 했나. 가장 아름다운 것을 찾아줄 순 없어도 계획에서 이탈한 불시착을 괜찮았던 추억쯤으로는 만들어줄 수 있겠다.

 

"쩨이야, 마릴린에 바다 있어?"

 

"아니, 없어."

 

하긴 나무 몇 그루랑 장미꽃이 사는 조그마한 별에 어떻게 바다가 있겠어. 바닥에 누워 우주를 올려다보면 날마다 유성우가 검은 동공 위로 쏟아졌다는 마릴린보다 아름다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구의 제이 옆엔 제가 있을 테니까.

 

쩨이, 바다 보러 가자.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신원 없는 놈 비행기 태워 제주도를 가겠나, 차도 없는데 반나절 걸려 부산 해수욕장을 가겠나. 그래서 선택한 곳이 인천 앞바다였다. 4월의 봄에도 바닷바람은 찼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모래 알갱이들이 폭 꺼졌다. 신발에 모래 들어오는 게 싫어서 바닥 보고 걸었는데 옆에 나란히 찍히는 발자국이 귀여워서 웃었다. 저보다 보폭도 크면서 굳이 굳이 제 발걸음에 맞추는 게 사랑스럽잖아. 키힝 하고 웃으면 김원필 바보 같아, 질색하면서도 맞잡은 손 꼼지락댄다. 내 손 놓으면 안 돼, 알지? 제가 없는 제이는 낯선 지구에서 외로울 테니까. 닿은 손 꼭 붙들었다.

 

달빛이 하얀 모래 위로 부서져 내려 이따금씩 모래알이 반짝였다. 필아, 여기 이쁘다.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는데 딱히 말리고 싶지 않았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진 머리 대충 정리해주고 말했다. 쩨이, 여기 있어. 나 잠시만 갔다 올게. 들리는 대답이 없었어도 아래위로 작게 흔들리는 머리통을 대답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김원필을 뛰어가게 만든 건 하나에 천 원 하는 작은 스파클러. 이거 인터넷에서 사면 하나에 백 원이더만 순 양아치들. 아무래도 좋았다. 천 원이 아니라 삼천 원이어도 샀을 건데 뭐. 외계인 양손에 폭죽 들려줄 생각하고 잔뜩 신나서 모래사장에 발 푹푹 빠지는 거 개의치 않고 달려갔더니 제이가 없었다. 그래, 얌전히 있으면 미친 외계인이 아니지. 목청 터져라 제이 어딨어, 불러대니 넘실대는 파도 근처에서 오도도 달려온다. 추운지도 모르고 바닷물 만졌는지 손이며 신발이며 젖어있어서 골이 아팠다. 대충 제 겉옷으로 물기 닦아내고 한적한 돌계단에 끌어 앉혔다.

 

"이거 뭐임?"

 

철사같이 생긴 기다란 쇠막대 들려주니 의아한 듯 빙빙 돌린다. 가만있어봐, 불붙이게. 스파클러 끝에 불을 붙이니 이내 하얀색과 노란색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불꽃이 튀었다. 처음엔 조금 무서워하나 싶더니 이내 불꽃을 들어 까만 밤하늘에 겹친다. 보통 사람들은 이리저리 흔들며 원을 그렸을 텐데. 우리 제이는 외계인이라 그런가 공기 중에 이지러지는 불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까만 밤하늘을 작게 수놓는 불꽃은 점점 길을 타고 내려와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별똥별 같다."

 

다 타버린 막대를 눈앞에 들이밀며 말하길래 예쁘냐고 물어보면. , 예뻐. 장미랑 같이 본 유성우 같았어. 대답이 돌아온다. 별비가 내리는 마릴린, 네 옆엔 장미가 있었지만. 기억해, 지구의 불꽃 옆엔 내가 있어. 입 밖으로 못 낼 말 대신 한 손에 새로운 막대 쥐여줬다.

 

그러더니 다시 꿍.

 

아 진짜 쩨이 뭐해. 라이터 가져다 대려는데 난데없이 또 이마 부딪치길래 불을 쥐고 있던 손을 거뒀다. 짜증 섞인 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꿍 꿍 꿍. 연속으로 세 번을 갖다 박길래 이마를 문질렀다. 쩨이 미쳤어? 불꽃이 예뻐서 그랬음. 불꽃하고 내 이마하고 뭔 상관이야 진짜. 너 한 번만 더 하면 치킨 안 사줘. 제 말에 통통한 아랫입술 삐죽이는데 그게 얄밉지가 않았다.

 

"좀 하면 안 되냐."

 

"그게 뭐 하는 건데. 박치기야 뭐야."

 

"놀릴 거야?"

 

"안 놀릴게."

 

머뭇거리다 들리는 다음 말에 참지 못하고 파항항 웃음을 터뜨렸다. 야 안 놀린다며. 끄학, 쩨이 너 너무 귀엽다. 정말로 효과적으로 시비 걸기 위해 고안한 새로운 방법인 줄 알았지. 누가 박치기를 그렇게 생각해, 낭만 없게. 부끄러운 듯 작게 웅얼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마릴린 애정 표현임.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일 때만 이마 부딪치더라. 미친 외계인은 애정 표현도 이상하게 했다. 그게 우주를 건너왔다는 제이랑 어울려서 의심할 생각도 안 했다. 생각할수록 웃기고 귀여워서 꺽꺽대고 웃으니 민망한 듯 말을 돌렸다. 김원필, 저거 봐. 완전 큰 불꽃. 한적한 4월 인천 바닷가에 저희만 있는 게 아니었는지 누군가가 쏘아 올린 불꽃이 밤하늘에 넓게 퍼졌다. 주변이 온통 어두웠고 밤하늘 불꽃은 색색이었는데 쏟아지는 불꽃들 눈에 담고 있는 것 같은 제이 귓가만 유독 발갰다. 하여튼 귀엽게 굴어.

 

쩨이, 나 봐봐. . . 퉁명스럽게 말했어도 동그란 머리통 돌려 제 쪽을 바라본다. 마릴린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다녔는지 온몸에 살이 없었던 제이는 그나마 볼살은 있었다. 말랑한 두 볼 손바닥으로 세게 누르니 통통한 입술이 부리처럼 벌어졌다. 와하학, 제이야 너 지금 병아리 같애. 불편한 듯 입술을 뻐끔거리길래 손에 힘을 풀었다.

 

"있잖아, 제이. 지구에서는 이마 말고 여기."

 

두 볼에서 손 떼지 않고 쪽 소리 나게 두 입술 붙였다 뗐다. 제이는 크지도 않은 눈 동그랗게 뜨고 어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살짝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 아쉬웠지만 제 앞의 외계인 이미 고장 나서 다시 손에 스파클러나 들려줬다. 예쁘다는 불꽃놀이 실컷 하라고 불붙여주려는데 별안간 스파클러 버리고 제 손목을 잡아 왔다.

 

", 이거 좋다. 또 하자."

 

사랑스러운 외계인은 정말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한다.

 

 

 

 

 

*

 

 

 

 

 

제이는 지 입맛에 맞을 때만 뽀뽀하더니 요새는 심심하면 입술을 부딪쳐왔다. 김원필도 그게 싫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으므로 공범인 셈이다. 두 입술 닿는 빈도와 장미에게 편지를 보내는 빈도수는 정확히 반비례했다. 창밖을 보는 것보다 제 얼굴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어쩌다 한 번 쓰는 편지 끝에는 꼭 다시 갈게, 다섯 글자 대신 이만 줄일게.

 

"김원필, 이거 가질래?"

 

맹한 얼굴로 내민 건 목숨처럼 여기던 목걸이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너 이거 있어야 돌아갈 수 있다며. , 그러니까.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던 목걸이를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둔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 지금 다시 줘도 목걸이 하지 않을 걸 알아서 서랍에 넣어뒀다.

 

"장미 안 보고 싶어?"

 

덤덤하게 묻자 보고 싶어, 답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근데 돌아가는 방법 몰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러 지적하지 않았다. 정말로 몰랐으면 목걸이를 버리듯 치우진 않았겠지. 아무튼 제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외계인이라면 외계인인 거고 마릴린으로 돌아가는 법 모른다면 모르는 거다. 김원필한텐 그랬다.

 

 

 

김원필 집에 머물렀던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제이는 멀쩡했는데 갑자기 아팠다. 감기냐고 몇 번을 물어봐도 그냥 놔두면 괜찮아진다는 대꾸만 했다. 외계인이 타이레놀 먹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자꾸만 속이 메스껍다고 마른 가슴팍 내리눌러서 약도 죽도 못 먹였다. 그래서 김원필은 정확히 이 주 뒤가 시험인 전공 수업을 빠졌다. 동기한테 밥 사주고 속기 받아오지 뭐. 입은 안 아픈지 누워서 가끔씩 입 터는 게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닌 듯했으나 원래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러운 법이다. 더군다나 연고도 없는 행성에 똑 떨어져 버린 제이는 얼마나 무섭고 힘들겠는가. 김원필은 이상한 데에서 공감을 잘했다.

 

"쩨이야, 왜 아프고 그래. 장미가 알면 걱정하겠다."

 

"너는? 너는 걱정 안 함?"

 

잘 덮어놓은 이불 사이로 고개 빼꼼히 들고 물어보길래 헛소리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해줬다. 제이는 처음 방문한 행성이 낯설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았어도 애처럼 구는 편은 아니었다. 아플 때 어리광부리는 게 지구인뿐만은 아니었는지 제이는 자꾸 되도 않는 투정을 부렸다. 필아, 나 물 줘. 아니 물이 너무 차갑잖아. 일로 와봐, 나 심심해. 기먼필 뭐하냐. 야아, 나 아파. 김원필이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눈 돌리면 방 전체가 다 보이는 단칸방에 누워서도 그랬다. 니 입은 안 아프냐, 물어보면 지구인은 원래 그렇게 멍청하냐고 또 입을 털었다.

 

"김원필, 나 추워."

 

"이불 하나 더 갖다줄까?"

 

"아니, 들어와."

 

크지도 않은 침대 옆쪽으로 꾸물꾸물 기어가더니 옆자리를 팡팡 쳤다. 제이야, 지금 낮 두 시야. 춥다고. 빨리 와. 찡찡대는 거 무시하고 바닥에 앉아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자 이불 발로 차고 빨리 안 오면 나 얼어 뒤짐 온갖 지랄을 하길래 그냥 포기했다. 쩨이, 너는 진짜 인성이 왜 그래? 물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눕자 니 때문에 아픈 거임, 중얼대며 슬그머니 몸을 붙였다. 춥다는 게 과장은 아니었는지 닿은 몸이 차가웠다. 김원필은 몸에 열이 많은 편이었으므로 낮은 온도의 살결이 닿는 게 나쁘지 않았다. 쩨이, 아기야? 답지 않게 어리광부리는 게 웃겨서 말하니 꺼지라며 툴툴대면서도 품을 파고든다. 낯설었으나 어느새 익숙해진 체향을 맡으며 대낮에 이불 안에 있는 것도 꽤 포근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한 강의였고 김원필은 비싼 노트북 들고 가서 속기를 하기는커녕 '집에 가고 싶다'와 같이 쓸데없는 말만 줄줄 적고 나온 날이었다. 강의 종료 10분 전부터 필통 집어넣어 짐 싸고 일등으로 강의실을 나선 것까지는 똑같은 하루였는데 사과대 건물 앞에 제이가 서 있는 것만 달랐다.

 

"? 쩨이, 여기 어떻게 왔어!"

 

한 번도 학교에 데리고 온 적이 없어서 제이가 여기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낯선 기색도 없이 멀뚱히 서 있는 모습에 반가움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다. 끄학, 쩨이야, 너 지금 되게 전봇대 같다. 뭐래, 김원필. 짜증 내면서 익숙하게 한 손을 잡아챘다. 우리 외계인,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잔뜩 신나 손 방방 흔들며 물으니 그냥 사람들이 알려줬음, 덤덤하게 답한다. 헐 쩨이 지구인 다 됐네. 집에서도 맨날 보는 맹숭한 얼굴 기대도 안 한 곳에서 마주치니 생각보다 더 들뜨는 거다.

 

4월 중순의 날씨는 항상 그래왔듯 햇볕이 좋았고 미처 떨어지지 못한 꽃송이들이 이리저리 팔랑거렸다. 가끔가다 살랑이는 바람이 살결 위를 스칠 때면 못내 설렜다.

 

"원필아, 여기는 꽃들이 많다."

 

"지구는 원래 그래."

 

마릴린에는 장미 한 송이밖에 없는데. 신기한 건지 불만스러운 건지 뚱한 얼굴을 하고 흩날리는 꽃잎 잡으려 마른 팔 휘젓는다. 벚꽃잎 잡기 따위는 고딩 때 이후로 딱지 뗀 김원필도 외계인이 그러고 있으니 흥미가 생겨 폴짝 뛰어다녔다. 다 큰 성인 남성 둘이서 캠퍼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게 퍽 이상했는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구경거리라도 된 듯 쳐다봤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어때, 제이는 외계인이고 나는 김원필인데. 한참을 미친놈들처럼 뛰어다니다 갑자기 제이가 우뚝 멈춰 섰다.

 

", 내가 이김."

 

의기양양하게 손바닥 펼쳐 보여주는데 꽃잎 한 장도 아니고 뭔 송이째로 쥐고 있는 거다. 존나 얄미움. 쩨이, 그건 반칙이지. 키 크다고 꽃을 따버리면 어떡해. 뭐래, 잡은 거거든. 딱히 내기를 한 건 아닌데 허무하게 끝나버린 게임에 시시해졌다. 두 마디보다도 작은 꽃 소중한 거라도 되는 양 빤히 쳐다보고 있길래 가방을 뒤적여 전공 책 꺼내 들었다. 강의 때 꺼내지도 않는 거 지금 꺼내 보네. 벚꽃 뺏어 들고 책 사이에 끼워 넣자 제이가 가뜩이나 작은 눈 더 가늘게 뜨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내 꽃 내놔. , 말리고 다시 돌려줄게. 혹시라도 꽃잎이 찢어질까 조심히 책 안쪽에 끼워뒀다. 쩨이, 코팅해줄 테니까 가져가서 니 장미 보여줘.

 

 

 

 

 

*

 

 

 

 

 

즐거우면 꺽꺽대며 배 부여잡고 웃고 수틀리면 쉽게 눈물 짰어도 김원필은 사리 분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가질 수 있는 건 꼭 가져야 했고 제 것이 아니면 선상에 두지를 않았다. 다만 제이는 들이려고 한 게 아닌데 범주 안에 들이닥친 거였고 있어야 할 자리가 이곳이 아닌 것도 알았다. 경계에 서 있어 가질 수도 없고 시선 돌릴 수도 없던 김원필은 내색 안 했어도 안녕을 손안에 두고 살았다. 제 옆에 있는 동안 잃어버리지 않게 두 손 꼭 잡고 있다가 보내야 할 때가 되면 온기 남은 손 흔들어 보이면 그만이다. 남겨진 김원필에 대해선 제이는 몰라도 된다. 안녕 후의 일은 몰라야 하는 것들.

 

부쩍 자다 깨는 일이 많아졌다. 악몽 탓이다. 제 것이 아닌 제이의 악몽. 평소에도 잠버릇이 나빠 얌전히 자는 편은 아니었는데 근래 들어 울며 깨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왜 울어, 쩨이. 마른 등 토닥이며 물어도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자꾸 그리운 느낌이 든다며 명치 언저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는 제이를 보고 침대가 넓게 느껴질 날이 머지않았단 걸 직감했다. 밤은 길었고 김원필은 세뇌하듯 괜찮을 거야, 중얼거리는 것밖에 못 했다.

 

 

 

그러니까 제이가 낯선 도시로 발을 옮긴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제이는 옆자리에 없었다. 심장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아무런 언질 없이 저를 남겨두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제이는 그런 사람이니까. 우습지도 않은 농담에 눈을 접어 웃어줄 수 있는 사람. 나쁜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가볍게 말을 해도 속이 깊어 뱉지 못한 말이 있는 사람. 쓸데없이 마음 여려 떠나겠단 말 못 하고 옆에 남은 사람. 서랍 속에 덩그러니 담긴 행성 모양 펜던트의 목걸이를 바라보다 뭔가에 홀린 듯이 대문을 뛰쳐나왔다.

 

제이가 우유를 못 먹는단 걸 알게 된 날 손 잡고 오렌지 주스 사러 갔던 우리할인마트는 아냐. 혼자 집에 있으면 밥 제대로 안 챙겨 먹을까 봐 모닝빵 세 봉지 사 온 뚜레쥬르도 아니고. 제이가 처음 온 날 제 옷이 맞지 않아서 편하게 입으라고 츄리닝 사다 준 단골 옷가게에도 없어. 그럼 어디지. 시답잖은 일로 입씨름하다 냄비 태운 날 먹을 게 없어서 외식하러 나온 갈빗집인가. 여기도 아니다.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갈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순살 치킨 사다 줬던 마늘통닭집에서도 안 보여. 그럼 혹시 학교인가. 떨어지는 꽃잎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벚꽃 송이째 잡았던 정보관 벚나무 아래도 아니네.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로도 기어이 울지 않고 아무렇게나 발을 뗐다.

 

제이, 지금 어디야?

우리 외계인 어디 있는데.

 

 

 

터벅대며 걷던 제이의 발자국이 한 번이라도 닿은 곳엔 빠짐없이 갔다. 흔적을 수집이라도 하는 사람마냥 일상이었기에 더욱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더 이상 가볼 곳도 없었지만 제이가 없는 집에 혼자 들어설 자신이 없어 정처 없이 걸었다. 제이야, 내 손 놓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사람들 버스에 오르내리는 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느 날 제 앞에 갑자기 나타난 그 날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우리의 처음에 가보질 않은 거다.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나의 제이는 그곳에 처음처럼 서 있으리라. 무작정 뛰었다. 밑창 해진 삼선슬리퍼에 발 대충 끼우고 목적지도 없이 걸어왔고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뛰어다니는 것같이 발바닥이 욱신댔으나 그딴 건 문제도 아녔다. 집으로 가는 461번 버스에서 정신줄 갖다버리고 잠들었던 탓에 내려야 할 곳을 놓치고 한참을 더 가서 내렸던 날. 멍청하게 버스 탈 생각도 못 하고 그 거리를 그냥 뛰었다.

 

4차선 횡단보도 앞. 대로의 경적 소리가 시끄러웠다. 횡단보도가 있는 길가에 멈춰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인다. 머리 벗겨진 택시기사가 욕을 지껄였다. 정신 나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신호도 바뀌지 않은 횡단보도 위에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습관처럼 만지작대던 목걸이만 없었다. 낯선 남자의 자살 시도를 목도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3월 초 어느 날이 따사로운 4월의 햇살 사이로 번졌다.

 

김원필은 역시나 시선 돌리지 못했고 정신 나간 남자를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 김원필이 차선을 가로지를 때마다 미친 새끼 운운하는 욕설과 고막에 꽂히는 경적 소리가 더해졌다. 갑자기 뛰어든 탓에 도로 위의 차들이 급정거했으나 김원필은 개의치 않았다. 미친놈 사랑하는 사람은 역시 미친놈이어야 했으니까.

 

있잖아, 제이.

그날 내려야 할 곳을 놓친 게 행운이라고 단정할 순 없어도 행복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있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텅 빈 손을 잡아챘다. 뒤를 돌아 눈을 맞추는데 울었는지 눈가가 짓물렀다. 아 쩨이, 우니까 작은 눈 더 작아졌잖아. 또다시 놓칠까 봐 손 부서져라 붙잡고는 기껏 한다는 말이 그거였다. 제이는 자질구레하게 놀려도 쉽게 웃곤 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프츠츠 거리면서 어이없게 웃는다. 닌 왜 울어. ? 나 울어? 마른 몸 위태롭게 서 있는 것만 보고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김원필은 자기가 울고 있는 줄도 몰랐다. 긴장이 풀려서 참았던 눈물이 터진 건가.

 

"왜 여기 있어?"

 

원필아, 로 운을 떼는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초록 불로 바뀌고 몇 명의 사람들이 주위를 스쳐 갈 동안 제이는 말하고 멈추고 머뭇대기를 반복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다. 낯선 지구에서 제이는 하루종일 저를 기다렸을 테니 두 입술 달싹이며 말 고르는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 행성이 뭐라고 떠날 수가 없지. 불꽃을 보면서 생각했어. 그게 유성우라고 착각하고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필아, 나는 거짓말을 하면 아파. 속이 메스꺼워지고 열이나. 돌아가는 방법 모르는 거 아니야. 근데 차라리 모르고 싶어서 거짓말했어. 왜 나를 멍청하게 만들어? 너는 왜 내 우선이 되는데? 왜 나를 안주하게 해. 혼자 누워있으면 추워서 잠이 안 와. 끝도 없는 우주 혼자서 돌아다녔는데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겨우 30분 동안 잡아주는 손이 없어서 불안했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나는 그동안 일 분마다 가로등 불 켜는 사람도 봤고 지가 왕이라는 사람도 봤고 별들이 다 지꺼라는 사람도 봤는데 그중에 니가 제일 이상해. 니가 너무 이상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냥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모르겠다며 무너지듯 계속 중얼거린다. 떠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 없었는데도 김원필은 안심했다. 이거면 됐다. 충분하다. 아무것도 모른다며 두서없이 말을 뱉었어도 제이가 제게 건넨 말은 조사 하나조차도 빠짐없이 한 단어로 귀결됐으므로 정말 다 괜찮았다.

 

그러니까 정신 나간 사람들마냥 한낮 도로 한가운데에서 욕지거리 들어도 아랑곳 않고 마주 보고 서 있는 건. 이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하나도 무섭지 않은 건. 언제 터진 지도 모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희뿌예도 너 하나 보고 걸었던 건. 너와 나를 멍청하게 만드는 건. 다 알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는 건.

 

 

 

"쩨이야, 그거 사랑이야.

지구에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

 

 

 

 

 

*

 

 

 

 

 

유난히 울 것 같은 날이 있다. 가장 평범해서 울어버리고 싶은 날. 제이는 한동안 하지 않던 기도를 했다. 쓰지 않던 편지를 썼고 날리지 않던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꾸준히 못 접어서 흐느적거리던 종이비행기는 얼마 못 가서 화단에 처박혔으리라. 편지 마지막에 무슨 말을 썼는지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평범하게 밥을 먹고 보통을 이야기하고 소소하게 닿다가 일상처럼 웃는 그런 날들. 오늘이 그런 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필아. 내가 죽을까 봐 무서워?"

 

대답을 못 했다. 자살 시도하는 사람마냥 위태롭게 차도에 서 있던 제이가 잔상으로 남았다. 불 꺼진 까만 천장 멀뚱히 응시하다 제 옆의 제이를 보는데 졸린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400살도 넘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밤 열 시만 넘어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곤 했던 제이가 새벽 한 시의 시간에 굳이 물어야 했던 질문이 그거라 마음 한구석이 내려앉았다. 그런 걸 왜 물어봐. 확언하지 않고 얼버무리기. 어떤 대답을 해도 정답이 아니다.

 

"가야 되면 가. 길들인 것엔 책임이 있는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어. 마릴린에 혼자 남겨진 장미를 떠올렸을 제이는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온점을 찍었다. 그 말을 끝으로 더이상 주고받는 말이 없었다. 둘 중 누구도 마지막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굳이 확실히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거지.

 

그날 김원필은 불면을 앓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언제나처럼 자리했던 마른 몸이 보이지 않을 걸 알았다. 제이 손 붙잡고 괜찮을 거야, 중얼댔던 어느 밤처럼 속으로 세뇌하듯 되뇌었다. 괜찮을 거야. 백 번쯤 되새겼을 때, 제이는 이미 잠들어있었다. 무계획적으로 지구에 불시착한 이방인 제이를 기억해줄 사람은 저밖에 없어서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제가 잊으면 여권도 신분증도 없는 신원 미상의 남자, 지구에 잠시 표류했단 사실은 기억 못할 꿈처럼 흐릿해질 게 뻔했다. 그건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김원필의 세계에서 제이는 분명히 살아서 제 옆에 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지구에 뚝 떨어진 것처럼 떠날 때도 홀연히 사라지겠지만. 어떠한 흔적도 없이 떠났을 때 제 심장 한구석에 흠집을 내어 흔적을 남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김원필은 낙인처럼 남은 흔적들을 끌어안고 살 테다. 마음 여린 제이를 가지 말라는 말 한마디로 붙잡을 수도 있었다. 내 옆에 있어 달라는 구차한 부탁으로 묶어둘 수도 있었고. 네가 필요하다는 울음 섞인 언질로 매달릴 수도 있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거다. 길들인 데에는 항상 책임이 있고 제이를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까지가 김원필의 책임이었으므로.

 

나는 죽지 않아.

마릴린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 알아.

너는 죽지 않고 우주를 비행할 거야.

두려움도 없이 암흑을 가로지를 거야.

내 사랑을 끌어안고 별자리를 횡단할 거야.

 

차분히 내려앉은 속눈썹 바라보다 서랍을 뒤적였다. 손에 차가운 체인이 걸렸다. 그 체인 가운데에 걸린 건 검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동그란 행성 모양의 펜던트. 노란색, 보라색, 하늘색이 형태 없이 섞인 동그란 마릴린은 제이와 퍽 잘 어울렸다. 그래. 다채로운 네가 사는 행성이라면 이 정돈 돼야지. 하얀 목덜미로 손을 뻗어 목걸이를 채웠다. 꽉 쥐고 있어 하얗게 질린 손바닥으로 혈색이 들어왔다. 김원필은 이제야 손 놓을 준비가 됐다. 파고든 손톱자국이 흉터처럼 남았지만 별거 아니다. 애처럼 웃으면서 이마 부딪쳤던 제이. 틱틱대면서도 상처 주는 말은 못 했고. 멀리서 쩨이 부르며 뛰어오면 오래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으면서 웃는 낯으로 반겼던 얼굴. 낯선 것들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저를 놓칠까 옷자락 붙잡았던 가느다란 손가락. 빠짐없이 기억한다는 건 길들여졌다는 반증. 제이가 길들이고 떠난 것에는 김원필도 포함이다. 알긴 아는지.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 동그란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오늘은 울면서 깨지 않기를 바라.

무지갯빛 구름 같은 꿈을 꿔.

나도 깨지 않을 거야.

그럼 잘자, 쩨이.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 때문에 먼지가 부유하는 게 눈에 보였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단칸방. 작은 움직임에 부스럭대는 이불 소리만이 허공을 메웠다. 니 잠 왤케 많이 잠. 부시시한 머리로 일어나는 저를 보며 모닝빵 물고 투덜대는 목소리가 없었어도 생각만큼 슬프진 않았다. 그냥 조금 허전할 뿐이지. 대학생 혼자 자취하는 방 넓을 필요가 없어 좁아터졌어도 월세가 싼 이 원룸으로 계약을 했던 건데 다시 보니 방이 쓸데없이 넓었다. 내일은 내 몸만 한 인형 사다 옆에 눕혀놔야지, 생각했다.

 

혹시 싶어서 살펴보니 코팅해서 책 위에 잘 올려둔 벚꽃 송이가 없었다. 지 물건은 기가 막히게 챙겨갔네. 예쁘게 잘 마른 벚꽃 보여주면서 말도 안 되는 설화 이야기해주니 내심 좋아했다. 원래 벚꽃잎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넌 통째로 잡았으니까 모든 사랑이 잘 되지 않을까. 구라까지 마, 말하면서도 얇은 꽃잎 찢어질까 봐 조심히 만지는 제이 보면서 이 외계인 사랑이 뭔지나 알까 생각했었다. 울면서 이상하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사랑한단 말 한마디 한 적 없었으니까.

 

제 손으로 두지 않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별 잡다한 물건들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 나란히 놓인 사과 세 개. 아씨, 하나도 아니고 세 개만큼이나 미안했나 보네. 사과 세 개 존나 하찮아서 꺽꺽대며 웃었다. 니 웃음소리 개신기함. 시답잖은 일로 끄하학거리며 웃으면 제이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지는 프츠츠 거리면서. 이 미친 외계인 돈도 없는 주제에 사과 어디서 훔쳐 온 거야.

 

예쁜 애들로 골라왔는지 반질거리는 사과 세 개 치우니 뒤에 놓인 하얀 종이비행기가 보였다. 그렇게 많이 접었는데도 꾸준히 못 접는다 진짜. 뭘 어떻게 접은 건지 뾰족해야 할 비행기 머리가 뭉툭했고 날개는 힘도 없이 벌어져 팔랑댔다. 이거는 보내려다 만 건가. 분명히 어젯밤에 비행기 날렸던 것 같은데 A4로 꼬깃하게 접은 비행기가 책상 위에 있는 게 이상했다. 우리 쩨이, 마지막 편지는 나한테 썼나 보네. 무심한 손길로 종이 펴보던 김원필은 웃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도록 웃었다. 아니. 울었다는 게 타당하겠다. 처음엔 분명히 웃었던 것 같은데 새어 나오는 건 울음소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너는 나를 무색하게 만든다. 순간 네가 없는 지구에 내던져진 게 두려워졌다. 괜찮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길지도 않은 열 글자 때문에 주저앉았다. 고작 두 달일 뿐인데. 아침에 일어나서 니 얼굴 보는 거 말고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너 없는 일상을 연기했다. 조금 허전한 게 아니라 텅 비어버린 건데. 슬프지 않은 게 아니라 밀려드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건데. 왜 또 나를 이렇게 만들어. 왜 떠나면서 이런 말을 해. 같이 울어줄 수도 없으면서 왜 날 울려. A4 용지 속 열 글자는 터무니없이 작았다. 흰 여백이 너무도 많았다. 연필 주먹 쥐듯 잡고 꾹꾹 눌러 적었을 제이가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제이는 한 바닥 꽉 채워 마지막 인사 건넬 수 있었으면서도 이 열 글자면 충분했던 거다. 누가 잘 있으라는 말을 그렇게 해, 제이야. 고민한 흔적도 없이 당연하게 열 글자 적힌 종이비행기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

 

 

 

 

 

4년이다. 제이를 만났던 스물셋의 김원필은 스물일곱이 됐다. 김원필은 여전히 학교 근처 원룸촌에 살고 있다. 제이가 좋아했던 마늘통닭집은 없어졌다. 뚜레쥬르는 여전해서 김원필은 종종 모닝빵을 집에 사다 놓았다. 가끔 울 것 같은 날엔 461번 버스 타고 제이를 처음 만난 대로에 내렸다. 제이가 입었던 옷은 버리지 않았다. 타지도 않던 봄을 탔다. 떨어지는 벚꽃잎 볼 때 제이를 떠올렸다. 시도 때도 없이 추억을 회상하곤 했지만 4월이 되면 유독 아렸다. 습관처럼 제이가 제게 한 말을 되새겼다.

 

김원필, 나를 믿어?

 

주저 없이 답할 수 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김원필은 제이를 믿는다.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진 마릴린에서 온 외계인. 소행성에 가려다 불시착해서 지구에 떨어진 거다. 외계인이라면서 지나치게 한국어를 잘했어도. 불편한 기색 없이 지구의 음식들 잘 먹었어도.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차들 보고 무서워하지 않았어도. 제이가 외계인이라면 외계인인 거다. 마릴린에 노을이 두 번 찾아왔다는 것도 믿었고. 매일매일 별똥별이 동공 위로 쏟아졌다는 것도 믿었다. 장미가 말을 한다는 것도. 439살에 별다른 성도 없이 이름이 제이인 것도. 제이가 살던 별에 엄청나게 큰 바오밥 나무가 있다는 것도. 너른 이불처럼 펼쳐지는 오로라 머리맡에 두고 잠 들었다는 것도. 여섯 개의 별들을 여행했다는 것도. 하나도 빠짐없이 믿었다.

 

간절하면 어디에 있든 들을 수 있어.

 

그러니까 이 말도 믿었다. 얼마 못 가 바닥으로 고꾸라질 종이비행기 날렸던 제이는 그거 소용없다는 제 말에 그렇게 말했다. 제이가 떠난 날이 되면 어김없이 편지를 썼다. 장미에게 편지 쓰던 제이처럼 하고 싶은 말 하얀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았다. 종이비행기는 제가 제이보다 조금 더 잘 접는 것 같았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 보기 전에 창문을 닫았다. 김원필이 본 종이비행기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도 밤하늘 높이 날고 있었다.

 

누구보다 간절했으므로 이 편지는 반드시 우주 어딘가에 닿을 테다. 제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

 

 

 

 

 

제이, 지금은 어디쯤이야?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가끔은 궁금해.

너 떠나고 버릇처럼 밤하늘을 봐.

유난히 빛나는 별이 보이면 저 별에서 네가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구나 생각해.

 

너 떠나기 전, 지구는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김원필이라고 말했지.

지구는 그냥 김원필이었다고.

나도 그래.

가장 빛나는 별을 볼 땐 네가 있겠구나 생각하고.

이 별은 네가 스쳤을지도 모르는 별.

저 별은 네가 곧 도착할 별.

아득히 멀어진 별은 네가 이미 떠난 별.

그러니까 나한테 우주는 온통 너야.

네가 아니면 의미를 잃는 셈이지.

 

네가 우주로 떠나고 4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너만큼 이상한 사람 못 봤어.

여전히 너만 흥미롭고.

너만 소중하고.

너만 다채롭단 뜻이야.

 

우주는 어때?

아름다운 것들은 많이 찾았어?

나는 자주 우주를 여행 중일 너를 상상해.

어지러운 은하수 겁도 없이 건너고.

알 수 없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비행하고.

잡아주는 손도 없이 끝없는 암흑을 걷어내고.

장미 옆에 앉아 아이처럼 웃으며 떠드는 모습들.

 

그런데 제이야.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건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4년 동안 생각해봤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걸 찾은 것 같은데 우리 쩨이는 아직인 것 같네.

알게 되면 너는 장미랑 반드시 지구에 올 거야.

그렇게 믿어.

네가 찾는 건 지구에 있을 테니까.

 

지구에 다시 오면 네가 좋아하는 것들 많이 해줄게.

시도 때도 없이 이마 부딪쳐도 뭐라고 안 하고.

마늘통닭집 없어졌는데 그것보다 맛있는 치킨 많이 사주고.

불꽃놀이 스파클러 인터넷으로 대량주문해서 손에 들려줄게.

너 지구에 있을 때 한 번도 안 한 것 같은데 사랑한단 말도 맨날맨날 해줄게.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약속한 거 다 해줄 거야.

농담 아니고 거짓말도 아냐.

너처럼 아픈 건 아닌데 너한텐 거짓말 안 해.

그러니까 이것도 거짓말 아니야.

 

여전히 너를 사랑해, 제이야.

우린 다시 만날 거야.

 

기억해, 나는 항상 여기에 있어.

 

너의 사랑이 있어 아름다운 별,

지구로부터.

 

2020. 04. 25. 토요일.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