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 | 남향
fools
박제형은 사과를 깎고 있다.
바보 같음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바보 같다는 것은 무엇인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김원필에게 듣곤 했던 표현이지만 파고들면 알 수가 없다. 완전히 바보인 것도 아니고 바보 같다고 한다. 완전히 바보 같다고도 한다. 그러나 너 완전히 재벌 같다고 해서 정말 재벌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정말 바보도 아니다. 완전히 바보 같음. 그건 무엇인지. 김원필은 자주 이것이 사실 내가 널 정말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박제형은 글쎄, 그 의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대체로 모든 김원필의 말에 회의적이었지만.
바보는 뭔지 알 것 같다. 그건 너랑 나. 박제형과 김원필. 박제형은 감자칼을 오른손에 쥐고 사과를 왼손에 쥔다. 감자칼을 사과 윗부분에 짓이겨 흠집을 내고 쭉 당긴다. 그것을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반복한다. 그것은 박제형의 과일 껍질 벗기는 방법이다. 박제형은 자기 뇌 안의 영한사전에서 감자칼의 영문을 peeler가 아닌 foolish knife로 저장해 놓고 있다. 이것은 김원필과 박제형이 가진 바보 같음의 산물 중 하나이다. 박제형은 이것 없이 과일을 깎지 못한다. 김원필이 없음에도 그렇다.
사과의 제철은 시월이라고 김원필이 박제형에게 알려 줬다. 가을이 되면 김원필이 사과를 사오곤 했고 박제형은 그때 문득 아 본격적으로 가을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박제형은 사과를 깎고 있다. 김원필은 없다.
그러나 김원필이 좋아할 것 같은 집이라고 박제형은 늘 생각한다.
*
김원필은 기본적으로 따듯한 사람. 박제형은 김원필의 장점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내색을 자주 내비쳤는데 김원필의 저러한 특징에도 적용되었다. 제이, 나는 사랑이 많아. 김원필은 이 말을 자주 했다. 그것에는 수긍했다. 너에게는 특히 많아. 싫지만 수긍했다. 사랑하는 건 김원필의 특기였고 김원필은 그것을 박제형에게 십분 발휘했다.
김원필이 처음 박제형을 본 것은 광주광역시 북구의 작은 식당에서였다.
원필아 미안한데, 하고 시작하는 전화는 칠 년 만에 걸려온 모친의 것이었다. 부친과 이혼하고 누나와 함께 인천을 떠난 모친은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데… 이 따위 말을 몇 분 읊조리다 말을 꺼냈다. 누나가 많이 아파서 말이다. 좀 도와줄 수 있겠냐. 김원필에게 모친의 음성은 불가항력이었고 그대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김원필은 짐을 배낭과 캐리어에 넣고 광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통화의 내용을 곱씹었다. 누나의 유방암이 목으로 겨드랑이로 퍼졌고 더는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손을 쓸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김원필은 미안하다는 말이 싫었는데 이 말을 대체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다. 엄마는 무슨 말을 했었어야 됐을까. 역시 미안하다뿐일까.
모친과 어색할 줄 알았으나 같은 지붕 아래에서는 금방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어차피 당분간 누나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며 내어진 방은 이미 물건이 빠져 있고 김원필에게 주어진 것은 말 그대로, 공간으로서의 방과, 침대와 책상과 의자였다. 그리고 누나가 좋아하던 향의 디퓨저였다. 사람의 취향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김원필은 그 향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즐겨보기로 했다. 김원필은 향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부드럽다거나 분말 같다거나 하는 말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지금에야 후회하는 중이다.
식당은 엷은 녹색의 타일을 겉에 두른 낡은 건물에 있었다. 간판은 초라했으나 손님은 많았다. 영업시간은 아침 일곱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로 아침엔 김원필의 모친이, 저녁부터는 김원필이 맡았다. 김원필은 모친에게 일주일 내리 요리와 식당 마감을 배우고서 가게를 혼자 볼 수 있었고 김원필이 박제형을 만난 것은 일한 지 한 달쯤 됐을 때였다.
박제형은 자정이 좀 넘어 식당에서 소주 두 병을 마셨다. 안주는 돈가스였는데 몇 입 대지도 않았다. 튀김옷이 소스를 먹고 차갑게 식어 가는데 박제형 얼굴만 뜨거웠다. 탈색모를 휘적대며 취해있는 꼴이 김원필에겐 낯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등산코스 근처의 식당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이 올 일은 별로 없었고 더군다나 저렇게 노란 머리를 하고 기타를 메고 오는 손님은 더더욱 없었다. 빨간 컨버스가 바닥을 정신없이 비볐다.
저기요. 이름이 뭐예요.
제이.
지금 새벽 한 시예요 재이 씨.
어. 나도 알아.
알면 나가야 되는데요.
내가 노래해 줄게.
돈 내야 돼요.
노래로 도둑질하는 사람은 아냐. 들어 봐….
컨버스만큼이나 빨간 기타가 케이스 안에서 끌려 나왔다. 앰프에 선을 연결하려다 몇 번 허공 인풋에 꽂았지만 박제형은 기억 못 할 것이다. 기타를 그럴 듯이 잡았다. 김원필은 이 남자(재이.)앞에 곧이곧대로 앉아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
검은 양복의 김원필은 익숙하지 않았다. 김원필에게도 그러하고 박제형에게도 그러했다. 박제형은 김원필이 울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김원필은 이런 곳에서만 예상하기 쉬운 사람처럼 굴었다. 박제형이 방명록을 쓰자 김원필은 놀란 눈치를 보였다. 재 아니었어요? 재라니? 재이 아니냐고요. 제이인데. 근데 방금 박제형이라고 썼잖아요. 박제형인데. 뭐예요. 제이인 동시에 박제형이야. 김원필은 자기가 2주 동안 박제형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미국인이라는데 이름이 재이일 리가. 박제형은 김원필의 눈물을 닦아 주고 영정 앞에서 묵념했다. 김원필의 누나는 기독교였으니.
박제형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김원필은 따라 나갔다. 너 자리 안 지키냐. 누나 보러 오는 사람 하나도 없어서요. 박제형은 김원필에게 담배 한 대를 빌려주었다. 김원필은 누나의 영정 옆에 있는 십자가가 짜증이 났고 믿을 사람도 없으면서 신이나 믿었다는 것도 화가 났다. 뭐가 좋았나. 그 부드럽고 분말 같은 향보다도 멀고 불확실한 것을 왜 붙잡았나.
박제형은 김원필에게 처음 노래를 들려준 그날 촉촉하게 젖은 김원필 눈길 앞에서 토했다. 김원필은 그것을 빌미로 매일매일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좋아요 재이 씨 노래가요. 박제형은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만이라고 당부했다. 노래를 부른 지 2주가 됐고 김원필의 누나는 죽었다. 오늘은 식당 안 해요. 장례식장 허해요. 이 메시지에 박제형은 발걸음을 옮겼고 그렇게 됐다. 김원필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침을 좀 했다. 평소에는 잘 피우지 않는데 오늘 같은 날은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추운데요 제이 씨.
어.
노래해줄래요.
싫어.
….
… 담배 피웠잖아.
그러면 키스해줄래요.
박제형은 그것이 어렵지 않았으니 장초를 버리고 김원필에게 키스했다. 밤공기가 차가웠고 김원필의 입술은 박제형보다 좀 더 뜨거웠다. 김원필은 눈이 오는 것 같다고 착각했다.
*
김원필은 장례를 마무리하고 박제형의 거처에 머물렀다. 박제형은 싸구려 모텔에 장기투숙 중이었다. 캐리어에 담긴 것들과 반쯤 걸쳐진 것들과 담겨있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사실 광주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죄다 취소됐거나 리스트에서 빠졌기 때문에 여기 온 의미가 없어졌다고 박제형은 말했다. 김원필이 왜 의미가 없냐 나를 만났잖아, 하고 대답하자 박제형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원필은 더는 누나의 방에 머무르기 싫었고 싫다기보다 슬퍼졌고 앞으로의 거주지에 대해 생각했다. 제이야 나는,
집이야 책상 놓고 침대만 놓을 수 있으면 돼. 넓으면 좋겠지만 아무렴 상관없어. 옥탑도 괜찮아. 그런데 해가 안 들면 꽝이야.
꽝이라니.
손해라는 뜻이야. 말짱 꽝.
김원필이 사과를 사서 깎아달라고 한 후 씻고 나왔는데도 깎여있지 않자 박제형을 위아래로 훑었다. 박제형은 과도를 멍청하게 내려두고 나 과일 못 깎는다는 말이나 했다. 김원필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감자칼을 꺼냈다. 과일도 못 깎는 바보라고 바보 같다고 이상한 멜로디에 음을 붙여 부르며 네임펜으로 Foolish Knife라고 적어 박제형에게 줬다. 박제형 전용 바보 같은 칼이야. 박제형은 그것으로 사과를 깎았고 김원필은 지금 사과가 제철이라고 했다.
*
김원필은 사라졌고 번호가 바뀌었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쪽지나 남겨두고 떠났다. 박제형은 자신의 잠귀가 얼마나 어두운가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슬퍼졌다. 그러게 사실 광주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는데.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김원필도 다. 박제형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김원필을 찾으려고 김원필이 좋아할 것 같은 집을 얻기로 했다. 좁아도 상관없는데요, 남향이어야 돼요. 까다로운 주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수중에 가진 돈으로 그것을 충족하는 집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달이 지나서야 좁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팔 평이었고 박제형은 여기서 두 명의 성인 남성이 살 수 있는가를 이따금씩 고민했다. 김원필을 찾아다니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김원필이 흘러들어오길 바랐다. 이런 점은 역시 바보 같다. 닮아버렸다,고 생각했다. 김원필이 특히 눈을 빛내던 곡을 상기한다. 제철의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박제형은 사과를 깎고 있다. 김원필은 없다.
그러나 김원필이 좋아할 것 같은 집이라고 박제형은 늘 생각한다.
사과가 최근 맛없어졌다고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