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 콜보이
fools and weridos
박제형은 손발 모조리 건강했다. 달랑달랑 위태롭게 붙어있어도 제구실은 했다. 멀쩡한 손가락으로 무표정하게 타자 꾹꾹 눌러 재꼈다. 3분 만에 현관 비번 뚫고.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배고파.”
김원필은 부르기만 하면 달려왔다. 박제형에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제 입맛대로 굴려 먹는 박제형을 죽어라 감싸고 돌았다. 김원필 표 짜치계는 늘 맛있었다. 끓이는 폼 보면 설렁설렁 재료 때려 박아 넣는데 맛은 김원필 아니면 따라 갈 수 없었다. 박제형은 멀쩡한 손 거두고 얌전히 입을 벌렸다. 기본적으로 눈치챌 수 있는 신호로 김원필을 들볶았다. 손가락 들어 박제형 입안에 쑤셔 넣으면 오물오물 잘도 씹고 다시 벌렸다. 알아서 먹어. 박제형은 음식물과 함께 대답도 씹어 넘겼다. 박제형은 연락할 구실이 없으면 짜치계 해달라며 김원필을 졸랐다. 김원필만 바라봤다. 세상에 김원필만 있는 것처럼 굴었다. 먹여줘. 밥해줘. 재워줘. 함만 대줘. 같이 자줘. 쫑알대는 박제형의 입을 타고 흘러 내려오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는데 진심이 아니었다.
그냥 키스했어. 그냥 잤어. 그냥 손잡았어. 그냥 겸상했어. 그냥……. 그냥이 어딨어. 그 정도 깜냥 견디지 못할 거면 박제형 하지 마. 박제형 버려. 박제형 놔줘. 건덕지도 없으면서 김원필은 박제형 옆에 꼭 붙어있었다. 그때 같아. 박제형이 키스하면 요동치는 심장 뒤로, 별거 아니라고 지껄이고. 부르는 데로 달려오고. 나는 아직도
콜보이
“재워줘.”
무작정 쳐들어와서 집주인 노릇 몇 번 하더니 비번까지 공유했다. 아침마다 계란후라이 냄새에 이끌려 기상하기. 욕실에 나란히 서 있는 칫솔 두 개 살피며 하품하기. 세 달에 한 번 버리는 치약 대신 두 달에 한 번 손때 묻은 치약 버리기. 화장대에 짱 박혀있어 잘 쓰지도 않는 수분크림 가져다 꺼내쓰기. 추억팔이 용 순정만화와 소년만화 겹겹이 쌓아두기. 매 끼니 인스턴트로 때우는 대신 제대로 된 식사 차리기. 일인용 침대에 굳이 낑겨서 살 부대끼며 숙면하기. 잊고 지내던 생일에 난생처음으로 초코파이 케이크 얻어먹기. 1인분 차리는 법 까먹기.
박제형은 김원필 없는 세상을 종종 생각했다. 낙원. 덜 좋아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제경에 수없이 듣곤 했던 간사한 말. 김원필은 모르는 말. 김원필 없이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 지 손가락에 꼽을 정도를 넘어섰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게 평범한 청춘 드라마라면 나는 김원필 없이 B급 로맨스 따위 찍지 않았을거야. 우리 자체로 로맨스 따위 틀려먹었어. 김원필은 무드없이 입술만 맞대고 가만히 있었다. 박제형은 애타지도, 김원필을 잡아끌지도 않았다.
원필아.
우리가 평범해?
우리는 무슨 사이야?
너는 왜 몰라. 너는 알아야지.
너덜너덜한 집에 어울리지 않은 깔끔한 본새가 들어왔다. 나이는 두 살 연하, 직업은 박제형 먹고 살리기. 시간 타고 거슬러 올라가 우리는 열아홉 경계에서 만났다. 김원필이 좆된 취직하기 전, 박제형이 제경과 엉덩이 맞대고 있을 때. 그 정도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둘은 손잡았다. 경계를 넘어가 울타리에 속할 때까지 몇 년, 몇십 년이 족히 걸렸다. 흘러가는 데로 놔둔 박제형이 원망스러울 새도 없었다. 사랑에 좆창난 불구만 아니었어도 박제형은. 김원필이 좆고딩 감성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때는 묵살하자.
박제형은 이상했다. 뒤지게. 김원필을 불구로 만들었다. 고장 난 심장 부여잡으며 박제형만 바라보는 호구였다. 제대로 코 꿰였다고 박제형을 저주했다. 새벽마다 생각난 그를 후회했다. 눈 감으면 끝없는 어둠 사이로 눈 뜨면 사라질 밝은 빛 사이사이로 단내가 스며들었다. 박제경이 김원필을 향해 뻗은 손이 물거품 되어 사라진다. 박제형이 입꼬리를 당겨 웃는다. 싸구려 연기 냄새가 코를 없애버릴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냄새가 미미하게 박제경에게 휩싸였을 때, 그때 박제형은. 예뻤다.
박제경은 그와 비슷했다. 그와 닮은 입꼬리를 당기며 원필에게 뻐끔거렸다. 한 마디 두 마디 제경에 밀렸다. 원필은 초조했다. 박제경보다 더 한 충격을 박제형에 심어주고 싶었다. 기타 둥둥거리던 제형과 어울리는 음악실 구석탱이 먼지 구더기 가득한 사이로 검정 머리칼이 노란머리 통 가리는걸 봤을 때 그 충격. 대가리 울리게 눈물 방울방울 떨어지는 그 충격. 김원필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박제형이 먼저 아구창 갈겼다. 입 닫고 시간 흐르길, 제형이 무덤으로 가져갔다.
“박제형 형.”
알잖아. 다 봤어요.
나 근시라서 멀리 있는 거 안 보여.
“나랑 눈 마주쳤잖아요.”
박제형은 이상했다. 열아홉 겨울, 적적한 교실에 새로움 따위 찾아올 수 없을 때, 노랑머리 털고 들어왔다. 두 살 많은 미국인. 명찰 박제형. 교장이 허락한 뻣뻣한 탈색 모. 김원필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을 박제형은 숨 쉬듯 걷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팔뚝. 산만 한 덩치. 박제형을 이길 수 있을까. 박제형의 존재가 너무 크다. 박제형이 작용하는 범위가 너무. 크다. 수백 번 벗어나고 싶어도 박제형을 어떻게 벗어나. 무작정 박제형이 임시로 가입한 밴드부 문 앞에 서 있었다. 김원필은 운명을 모른다. 필연이라고 짜인 가소로운 인연만 철석같이 믿는다. 그는 박제형과 운명을 꿈꿨다. 박제형이 음악실에서 박제경과 머리통 맞대고 있지 않기를. 잡을 줄도 모르는 기타로 박제경과 엮기지 않기를. 빌었다. 버석한 손이 어디에 닿을까, 박제형은 무식하게 손가락만 기니까 피아노에 닿았으면 좋겠다.
싸구려 연기가 폐를 지나 뇌로 도달한다. 머리에 이름 석 자 제대로 박힌다. 손이 무겁다. 발도 묵직하다. 가벼운 입술이 평소보다 제구실을 못한다. 입에 가득 들어찬 그 이름이 찢어지게 무거운 목구멍으로 추락한다. 무거운 눈꺼풀이 감긴다. 연기를 따라 몸 구석구석 제구실을 망가뜨린다. 연민 하나로 불구가 될 수 있다면 그를 붙잡고 물을 것이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불행을 사랑하잖아.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세상이 온통 밝은 빛으로 뒤덮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눈덩이가 반짝였다. 낭만이 절로 숨 쉬었다. 들숨 날숨 곳곳에 겨울내음이 온몸을 시리게 했다. 추억으로 적셔질 게 분명한 곳에서 피아노 울림이 이끌었다. 그때 난방기구가 먹통이었어. 그때 전교에 전기도 나갔어. 추워서 온기가 필요했다. 따뜻해지고 싶은 욕구가 좀, 틀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입안으로 먹혔다. 본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제일 늦게 난방기구를 고친, 밴드부실이 담백한 열기로 뒤덮였다. 막무가내로 던져진 기타. 바닥에 떨어져 다시는 못 찾은 피크. 피아노 건반 위를 쓸어내린 후드집업. 뭉근한 분위기에 취한 사람이 진다. 입안이 열기로 가득 찼다. 가벼워진 입술이 겹친다. 저급쾌락이 뇌를 침식한다. 손끝 발끝의 날 선 감각이 저릿하다. 생생하다. 척추를 타고 뇌로 차오른다. 밀려들어 오는 박제형이 평생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입술이 무거워진다. 미숙한 덩어리가 잔뜩 뭉개졌다.
박제경은 세계다. 잃을 것 없는, 어둠을 세계로 만드는, 박제형의 강자다. 박제형은 박제경에게 늘 졌다. 박제경은 박제형이 쉬웠다. 정성 들여 재단하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구성한 박제경은. 헤지고 낡고 다 지쳐 쓰러져가는 박제형은. 위태로웠다. 만난 시간이 물거품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발버둥 쳤다. 무서웠다. 시간을 할애해서 박제형을 만들었으면 책임져야 한다. 박제경이 죽을 때까지 거두어야 할 숙명. 운명이다. 무미건조한 인격에 수분을 더한 사람으로 만들었으면. 책임져야지. 박제경은. 그러니까
“티 내지 마.”
무드라곤 뼈 빠지게 기타만 치는 박제형이. 꼴에 사랑한다고, 죽으면 같이 묻어달라는 기타도 버렸다. 사랑이 뭐라고. 박제형이 예전처럼 기타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사랑 때문에 멍청해져서 자기가 불구가 되기를 염원하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다. 허무하게도 박제형은 세계를 쉽게 버렸다. 기타를 매장했다. 물거품이 된 허상에서 벗어났다. 사랑은 약했다. 박제형을 망가뜨리고 때로는 쉽게 내팽개쳤다. 수 없이 함께한 기타가 낡아서 제구실을 못할 때 즈음, 박제형도 서서히 불구가 되어갔다. 연애 불구로. 물들어갔다. 꼴에 아무렇지 않은 척. 박제형 주제에 마음 닫은 척. 정나미 따위 버린 척. 더 좋아하지 말고 덜 좋아하는 척. 모자란 시선으로 박제형을 훔쳤다. 덜 좋아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제경과 입술 맞대고 비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키스하는 법이라도 알려주듯 간사하게 입술만 비벼댔다. 타이밍 맞춰 손 잡는 법을 터득했다. 머리로 배운 사랑이 얼마나 간사한지 잘 알고 있음에도, 사람이란 게. 안 되더라. 협소한 밴드부실에서 연습했던 생생한 감각이 막상 부딪히니 새로운 감각으로 전이하고, 처음은 쉽게 잊혔다. 사랑에 눈멀었다. 늘 그래왔듯 눈부터 멀었다.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보다 뒷자리에 앉아 검은 뒤통수만 쳐다보는 날에는 밤을 지새웠다. 시차 적응이 덜 된 거라고.
김원필은 이상적이다. 사랑으로 완벽하게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는 애정이 없다. 말라비틀어진 그의 뇌를 주물러 팽팽해진 기억을 다듬어 꽉 채우고 싶었다. 로망 따위 없는 키스만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었다. 단단한 껍데기에 비해 물렁물렁한 속까지 주물러 박제해 영원히 물렁물렁한 사람으로 곁에 남고 싶었다. 대신 겹쳐진 입술만큼 물렁물렁하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끔, 단단했으면 좋겠다고. 로망이 살아 숨 쉬는 그는 박제형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인생을 너무나도 쉽게, 하다못해 가소롭게. 걷고 있었다. 연인이라고 박제경밖에 없는 그가 처음으로 손을 맞잡고, 입술을 비비고, 발맞추어 걷고, 작은 머리통을 어깨에 기대고, 그런 사랑이 메말랐다.
“1달러 주면”
키스해줄게.
박제형이 매달린다. 그렇게 망가진 박제형은 처음이다. 키스하자고 대놓고 조르는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박제형이 처음으로. 어렵다. 이상하다. 그렇게 매달릴 만큼 김원필이 박제형에 중요한 사람이었나. 근본을 따질 정도로 박제형은 서서히 망가져 갔다. 박제형은 뭐든 손수 하는 법이 없었다. 남을 자극해 본인에게 돌아오게 하는, 지독한 연애 불구였다. 김원필 한정일수도, 박제경 한정일수도. 아무도 모르는 그 한정을 박제형만. 오로지 박제형이라서 넘나들 수 있었다. 박제형이 갈망하는 로망은 안타깝게도 그에게 돌아왔다.
“형은 첫 키스에 로망 없어요?”
세계가 끝났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이 빛으로 침식했다. 침몰한 빛은 눈만 감으면 사라졌다. 한낱 박제형과 일생을 함께한 세계는 달처럼, 박제형을, 등졌다. 메마른 지구는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났다. 빛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듯 원필은 제형에게 밝게 빛났다. 환히 빛나는 금성을 앞에 둔 지구는 여전히 금성 뒤에 있었다. 달은 천천히 지구의 회전을 감상했다. 사람도, 행성도 빛을 좇아 갈망했다. 밝은 빛은 원필 앞에, 제형 앞에, 제경 앞에 어떤 존재로든 살아 숨 쉬어왔다. 늘 그랬듯.
처음 느껴본 감정보다 덜하게, 새로운 느낌보다 격하게 맞닿는 세계가 불현듯 떠올랐다. 원필과 입술을 나눌 때 지겹도록 떠오르는 박제경이 지독하다. 같잖은 로망에 시달리면서 박제경의 간사한 얼굴이 너무나도 뚜렷해서, 지긋지긋해서 박제경이 미웠다. 죽어라 미워했다. 죽어라 미움받았다. 눈만 감으면 아렸던 박제경의 향기가 서서히 원필의 살내음으로 빨려들었다. 어린 박제형은 도망쳤다. 세계로, 로망으로.
박제형을 통치하는 간사한 박제경. 박제형을 쥐고 있는 박제경. 박제형이 박제경에게 벗어나기를 바랐다. 빨리 도망쳐서 냄새까지, 얼굴까지, 이름까지 잊기를 바랐다. 누구보다 박제형을 이해해줘서 그렇다고. 누구보다 박제형을 잘 알아서. 그 누구보다. 박제형을 좋아해서. 잊으라고. 울며 빌었다. 좋아해서 잊어주는 거야. 박제경에게 배운 사랑은 이토록 무자비했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로망 역시 박제경은 박제형 그 자체였다. 사랑은 머리로. 애정은 몸으로. 제경은 그게 전부였다. 작은 박제형이 겨우 받아들인 이론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작용했다.
“숨겨.”
그거면 돼.
간신히 어둠에 먹혀들어 간 빛이 꼴에 영롱하게 빛났다. 자연의 섭리가 얄궂다. 목소리의 형태가 전부 물거품이 되어 일그러졌다. 박제형을 빼닮은 모든 요소가 물거품으로 변해도 원필은 가만히 감상했다. 그가 웅얼거리는 입 모양을 수 없이 음미했다. 수백 마디가 합쳐 만들어낸 문장들이 가엾게 분해된다.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물처럼 흩어지는 박제경은 결국 마지막에도 멍청하고 호구처럼 누그러졌다. 사랑에 미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멍청한 순간만 남는다. 박제형과 닮은 입꼬리를 당기며 온몸이 물거품으로 흩뿌려졌다.
내가 김원필에게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박제형에 화내면 어떡하지.
박제경은 구차하게 사라졌다.
원필이 느리게 끔뻑거렸다. 꿈. 생경한 감각이 뇌를 정지시켰다.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통제가 안 되는 기분이 꼬인다. 몇 년이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는데도 불쑥 튀어나오는 그 얼굴은 아직도 치명적이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 박제형은 뼈 빠지게 보고 싶은데, 어디로 튀었는지 고등학교 졸업 후에 코빼기도 안 보였다. 괘씸하게 미국이라도 갔나 싶었다. 존나 괘씸한데 박제형다워서, 박제형 그 자체라서 연락 따위 오기로 안 했다. 버려진 호구 신세로 몇 년을 살았다.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부풀어 터질 지경인데 어느 날, 어느 순간 만날까봐 그저 박제형을 잊어버리려 급급했다. 다시 만나면 무작정 키스부터 갈길까 봐. 원필은 두려웠다.
“살려줘.”
아구창을 갈겨대며 쪽쪽 빨기만 했던 키스는 이제 더는 구현해내지 못했다. 치열을 훑고, 박제형이 좋아죽는 입 안 깊숙한 곳을 찔러주고, 혀가 맞닿는 키스를 능가하지 못했다. 과거의 성난 키스는 더는 없었다. 김원필이 과거의 혓바닥을 뽑아 박제형이 소멸시켰다. 우리는 이만큼 빨아대는데 아직도 네 손은 왜 가만히 쭉 펴져 있는지 모르겠어. 가만히 안겨있는 나를 밀치지 않는 이유도 모르겠어. 너는 아직도 모르겠어.
6년 만에 박제형이 두꺼운 얼굴을 드러냈다. 무작정 살려달라고 비는 박제형이 작았다. 산만 한 덩치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초라한 박제형만 남아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왜 연락 안 했어. 비련의 질문은 목구멍을 타고 녹아내렸다. 그러면 박제형은 또 입술을 부딪쳤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고 우는 것 같아서 원필은 늘 그랬듯, 묵살했다. 아슬한 관계를 청산하는 감각이 진부했다.
집에서 어설픈 짜치계 먹고 있을 박제형이. 김원필이 째깍 집에 들어오면 침대에 널브러져야 할 박제형이. 없다. 쪽지 하나 남겨둘 머리 하나 굴리지 않을 박제형이 고분고분하게 영어로 지껄였다. 자기 마음대로 사라졌다, 눈에 밟혔다. 익숙해지려 애를 써도 익숙해지지 않는 게 기묘하다. 타고난 분위기가 묘하다. 몇 년을 맞대도 늘 새롭게 대하는 박제형에 적응하려면 십 년은 멀었다.
사랑하니까 나중에 보자고 그렇게 일렀다. 사랑하니까. 김원필은 박제형만 바라보는 호구의 극치니까. 박제형은 김원필만 모르는 불구니까. 도망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생각만 둥둥 떠다녔다. 때로는 비바람 치듯 그를 잊었다. 로망 없이 부딪힌 키스의 감촉을 어떻게든 좇아 기억하기 바빴다. 박제형은 나름대로 생각이란 것이 존재했다. 김원필이 예쁘지만 않았어도, 김원필이 우습지만 않았어도, 김원필이 유치하지만 않았어도. 덜 사랑하는 쪽이 이겼을 텐데, 따위의 말을 상기시켰다. 수십 번 절제하고 수백 번 욕망을 감췄다. 보이면 닿고 싶고. 들으면 붙잡고 싶고. 멍청한 연애는 뇌에 괴리감을 토해냈다.
개처럼 굴렀다. 닥치는 대로 살았다. 막무가내로 아무나 붙잡았다. 박동을 느낄 새도 없이 굳어진 채로 뛰는 것을 느꼈다. 한없이 작은 박제형에 터무니없이 큰 톱니바퀴를 억지로 끼워 그런 데로 굴러가도록, 아무 생각 없이, 살아남았다. 거칠게 흔들린 몸이 자연적으로 반응하면 이름 모를 쾌감이 뇌를 잠식했다. 덥수룩한 머리칼이 붙잡힐 때마다 몽롱한 기분이 밀려들어 왔다. 목덜미를 뜯기면 뜯길수록 텅 빈 감정에 쏠려 감정 따위 묻어버리기에 급급했다. 힘 없는 허벅지를 벌리면 넘쳐 오르는 흥분을 퍼붓기 바빴다.
허벅지 안쪽에 점 있는데. 김원필을 미치게 하는 방법. 둔해 터진 줄 알았던 박제형이 대주라고 애원한다. 박제형 주제에 김원필을 밝힌다. 6년의 부재 동안 모든 정이 식었어도 더러운 몸 정만큼은 한 톨도, 한 알도 식지 않았다. 사랑하면 다야. 박제경이 박제형에 가르쳐주지 않은 유일한 애정. 단세포처럼 열망하고 갈구하고 하등 부끄러운 감정으로 똘똘 뭉친 낭만을 키웠다.
“원필아.”
미국 가자. 새벽에 일어나 아침까지 부대끼고 음식 시켜놓고 뒤지게 몸 맞대고 일어나면 너 나 할 거 없이 모닝 키스로 포장한 입맞춤을 나누고 저녁 바람 맞으며 바다 구경하고 골목길에서 몰래 손잡아보자. 오라는 데로 오고 가라는 데로 가는 너는 어차피 나랑 같이 있어야지. 낭만 이딴거 흘러넘치는 너라서 로망 따위 얹어도 너는 모를 거야. 키스하자. 섹스하자. 손깍지 끼자. 마주 보고 앉아 제대로 차려진 식사 하자. 김원필 하지 말고. 김원필 버리지 말고. 김원필 놔주지 마.
“박제형.”
나는 아직도
콜보이